전시실 소개
광교 역사문화실에는 광교신도시 조성에 따라 출토된 발굴유물들과 도시변천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개발로 훼손되는 어메니티 자원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광교 역사문화실은 광교신도시가 선조의 숨결이 담긴 정취 있는 마을에서 역사ㆍ문화도시,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환경 생태도시로 새롭게 조성되어 희망과 기대가 아울러 공존하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시실 구성]
- ① 광교의 역사
- ② 광교의 유래
- ③ 광교의 삶과 문화
- ④ 광교의 문화유산
전시유물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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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
신석기시대 | 높이 39.4cm 복원입지름 26.7cm상현동 271-2 일대의 신석기시대 집터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토기의 모양은 바닥이 뾰족하며, 그릇 몸통의 지름보다 속이 깊다. 입술은 곧으며, 입술면은 편평하게 마무리되었다. 외면에서 빗살 같은 줄이 몸체 중반까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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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달린 짧은 목단지
통일신라시대 | 높이 12.9cm 입지름 9.1cm 바닥지름 5,4cm
하동 622 일대의 삼국시대(백제) 집터에서 출토되었다. 단지의 몸통은 둥글며, 목 부분은 비스듬하게 좁아지다 밖으로 벌어진 입술과 이어진다. 몸통에는 가로세로가 일정한 간격으로 직각이 되는 두들개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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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화 묘지
조선시대 | 길이 19cm~19.7cm 너비 15~15.4cm 두께 1.6cm
원천동 산46 일대에서 출토된 이만화(1662~1708)의 청화백자 묘지이다. 묘지문墓誌文은 전前 공릉참봉恭陵參奉 윤관주尹觀周(1675~?)가 지었으나 글씨를 쓴 사람은 기록하지 않았다. 제작 시기는 1744년(영조 20)이다.
이만화는 정종定宗의 제10왕자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이며 자字는 군실君實이다. 수원水原 장죽長竹에 거주하며 판서 한성우韓聖佑(1633~1710)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관직은 나가지 않았다. 사후 수성산隋城山 남리南里 신좌辛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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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공 김순 묘지
1321년 | 71cm×71cm | 안동김씨 문영공파 종중 위탁
김순金恂(1258~1321)은 고려 충숙왕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귀후歸厚이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1212~1300)의 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 문과 급제 후 출사出仕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판삼사사判三司使에 이르렀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수원시 광교신도시 안동김씨의 선조이다.
김순 묘지는 1943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에 있던 묘를 1943년 안양시로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묘지문은 1321년(고려 충숙왕 18) 여흥군驪興郡 민지閔漬(1248~1326)가 글을 지어 앞뒤에 새겨 놓았으나 글씨 쓴 인물은 기록하지 않았다. 제액題額을 “고려국중대광상락군김공순묘지증시문영공高麗國重大匡上洛君金公恂墓誌贈諡文英公”이라고 큰 해서楷書 글씨로 쓴 후 본문은 작은 해서 글씨로 정성들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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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 고신
1574년(선조 7) | 74.5cm×42.5cm | 김호식 위탁
고신告身은 조선시대에 1~9품 관원에게 품계와 관직을 수여할 때 발급하던 임명장이다. 내용을 보면 ‘이조만력이년오월초육일吏曹萬曆二年五月初六日 봉교봉직랑행사간원정언겸춘추관기사관김찬위봉직랑행성균관전적奉敎奉直郞行司諫院正言兼春秋館記事官金瓚爲奉直?行成均館典籍’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왕명을 받들어 눌암 김찬金瓚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김찬의 관직은 사간원 정언 겸 춘추관 기사였다.
김찬의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숙진叔珍이며, 호는 눌암訥庵이다. 조선 개국공신 익원공 김사형金士衡의 7대손 참의공 김언침金彦沈의 셋째아들이다. 1567년(명종 22)에 진사가 되고, 1568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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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옷
조선중기 | 뒷길이 121cm 화장 71cm 뒤품 57cm
장옷長衣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후 겉에 입는 조선시대 여성의 가장 대표적인 외출복이다. 이 유물은 소렴에 있었던 겹 장옷으로 녹색이 뚜렷이 남아있다. 겉감은 구름무늬의 문능紋綾이고 안감은 성근 주紬로 만든 겹옷이다. 섶선 안으로 들여 달린 목판깃과 겨드랑이 아래 사각접음무가 달린 것이 특징으로 길감과 다르게 자주색 연화문단으로 장식하였다. 겨드랑이에서 이어지는 소매는 일자형이며 소매 끝에 흰색 거들지를 달아주었다. 현재 고름은 소실되어 달려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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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저고리와 겹치마
조선중기 | 겹저고리 : 뒷길이 47.0cm 화장 71.0cm / 겹치마 : 뒷길이 94.5cm 치마폭 410.0cm 허리둘레 108.0cm| 안동김씨 효헌공파 종중 기증 | 원형복제품
치마와 저고리는 여성의 대표적인 옷이다. 저고리는 깃, 곁마기, 고름을 자주색으로 사용한 회장저고리 형태로 겉깃이 모두 목판당코깃(여밈 끝이 버선코처험 뾰족한 모양의 깃) 양식이다. 소매의 모양은 겨드랑이에서 소매로 완만하게 줄어드는 일자형이며, 길(몸통) 부분의 옆선과 도련은 완만한 곡선이다.
전시된 치마 겉감은 화문단, 안감과 허리말기는 성근 명주로 만든 겹치마이다. 17세기에는 여성이 치마 위로 저고리를 입었을 때 치마 허리말기가 살짝 덮히는 정도로 입었다.